승진·로펌 진출시 유리"
미국 드라마로 영어 공부 회계·변리사 자격증 도전
"시야 좁아진다" 지적도
서울중앙지법 조은경(29) 판사의 트레이드 마크는 '영어'다. 그는 지난해 법원이 처음 개최한 영어사법좌담회에서 유창한 영어 실력으로 주목 받았고, 외국 법원과 협력업무를 담당하는 사법공조TF팀 멤버로 활약하고 있다. 그는 요즘도 틈나는 대로 영어 소설을 읽고 미국 드라마를 본다고 한다. 영어로 '존재감'을 알린 그는 올해 초 여성과 비법대(서울대 경영학과)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민사수석부에 발탁됐다. 긴급한 가처분 사건을 다루는 민사수석부는 실력을 인정받는 판사들이 뽑히는 중요 재판부다.
인사 때마다 3대1이 넘는 진입 경쟁이 벌어지는 서울행정법원의 행정소송 전담 재판부에 입성한 A판사는 요즘 행정법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 전문성을 길러 행정소송 전문 법관이 되는 게 그의 목표다. 이들 외에도 상당수 판사들은 법원 내부 통신망에 있는 지적재산권·국제법·국제거래·의료 등 각종 연구 커뮤니티에서 적극 활동하고 있다.
매년 새로 임명되는 법관이 130명이 넘고, 전체 법관이 2400명을 넘어서면서 판사들이 자신을 돋보이게 하는 전문성을 키우는 데 힘쓰고 있다. 판사들도 이른바 '스펙'(학력이나 경력 같은 어떤 사람의 조건을 통칭하는 말)을 쌓는 시대가 된 것이다.
이런 분위기는 전문성을 가진 법관들이 주요 재판부에 발탁되는 추세와 무관치 않다. 실제 관련 사건이 늘고 있는 기업·지적재산권 분야에선 공인회계사·변리사 같은 전문자격증을 갖춘 판사들이 각광을 받고 있다.
특허법률사무소에서 변리사로 1년 넘게 일한 경험이 있는 서울중앙지법 권창환 판사는 올 초 선망 부서로 꼽히는 지적재산권 전담부로 배치됐고, 서울중앙지법 파산부에선 공인회계사 출신의 엄상섭 판사가 활약하고 있다. 전국적으로 17명의 '변리사 판사'와 15명의 '공인회계사 판사'가 있는 것으로 집계된다.
판사들이 전문화에 목말라하자 사법연수원은 2004년 18개이던 법관 연수과정을 지난해 40개로 늘렸다. 2007년 이후 영어강의가 등장했고, 의료·건설·재개발재건축실무 같은 전문 프로그램도 최근 1~2년 사이에 새로 생겼다.
판사들이 전문성 강화에 열을 올리는 이유는 점점 다양화·세분화돼 가는 각종 민·형사 사건을 매끄럽게 처리하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갈수록 높아져 가는 승진의 문턱에서 '생존 가능성'을 높이기 위한 목적도 있다. 한 중견 판사는 "전문성이 있으면 승진뿐만 아니라 법복을 벗고 나서 로펌으로 갈 때도 유리한 게 현실"이라고 말했다. 실제 법원의 민사집행법 커뮤니티 회장을 맡았던 민일영 대법관이 최근 대법관에 임명되면서 법원 내 각종 커뮤니티 활동이 더 활성화되고 있다는 얘기도 나온다.
대법원도 1998년 특허법원과 서울행정법원을 독립시킨 이후 꾸준히 전문화를 추진해왔다. IMF경제위기를 겪으며 1999년 신설된 서울중앙지법 파산부는 현재 소속판사만 21명에 달해 소규모 지방법원 수준으로 성장했다. 가정법원에선 2005년부터 가사소년 사건만 전담하는 전문법관제도가 도입됐고, 올 들어 법원 상설조정센터가 서울과 부산에 생기면서 사실상 조정전문법원도 만들어졌다.
그러나 법원 일각에선 전문화 움직임의 부작용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젊은 판사들이 전문분야 경력 쌓기에만 몰입하면 세상을 넓게 보는 눈을 기르기 어려워지고 자칫 선입견이 생길 수도 있다"는 것이다. 외국에서도 독일의 경우엔 노동법원·조세법원을 따로 둘 정도로 전문화돼 있지만, 미국·영국에선 파산법원만 따로 두고 지나친 세분화를 하지 않는 등 법관 전문화를 보는 관점이 조금 다른 게 현실이다.
법원행정처 이승련 인사총괄심의관은 "'제너럴리스트'와 '스페셜리스트'가 적절히 조화를 이뤄야 질 높은 재판을 기대할 수 있다"고 말했다.
<2009년 11월 2일 월요일 조선일보 정한국기자>